세계 최초 순수 파운드리 회사의 시작
1987년, 대만 정부는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에서 25년간 근무한 모리스 창(Morris Chang)을 공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으로 초빙했습니다. 대만은 모리스 창에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라는 국가적 미션을 내렸는데요. 당시 모리스 창의 나이는 56세. 50대 중반의 그가 내린 결정은 업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반도체 산업의 주류는 인텔, 삼성, TI 같은 종합반도체회사(IDM)였습니다. 이들은 칩 설계부터 제조,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했죠. 하지만 모리스 창은 이 방식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분업 체계가 더 효율적이며, 각자의 전문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모리스 창의 비전은 명확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체 칩을 설계하거나 판매하지 않는다. 오직 다른 회사를 위한 제조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순수 파운드리(Pure-Play Foundry) 모델,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의 탄생 배경입니다.
80/20 법칙의 적용
TSMC의 전략은 80/20 법칙의 가장 극단적인 적용 사례입니다.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가장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20%인 "제조"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나머지 80%인 설계, 마케팅, 브랜딩을 완전히 포기한 것입니다.
이 결정이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고객과의 신뢰 구조 때문입니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같은 팹리스(설계전문) 기업들은 자신들의 최첨단 설계를 종합반도체회사에 맡기는 것을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시에 경쟁사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설계 노하우가 유출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TSMC는 "우리는 고객과 절대 경쟁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자체 브랜드 칩을 만들지 않으니 고객의 기밀을 지킬 수 있었고, 모든 고객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TSMC가 중립적이고 신뢰받는 제조 파트너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핵심입니다.
집중의 힘은 기술 혁신으로도 이어졌습니다. TSMC는 7nm, 5nm, 3nm 등 최첨단 공정 기술 개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영역에 자원을 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024년 기준 TSMC는 288개의 서로 다른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522개 고객사를 위해 11,878개의 다른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결과와 성과
TSMC의 80/20 전략은 놀라운 성과를 낳았습니다. 2025년 2분기 기준, TSMC는 전 세계 순수 파운드리 시장의 71%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2위 삼성전자(12%)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격차입니다. 한 애널리스트는 "TSMC가 파운드리 산업 전체 이익의 110%를 만들어냈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TSMC의 이익이 모든 경쟁사의 손실을 합친 것보다 10% 더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재무 성과도 눈부십니다. 2024년 TSMC의 연간 매출은 901억 달러(약 128조 원), 순이익은 365억 달러(약 52조 원)에 달했습니다. 영업이익률은 45.7%로, 제조업치고는 경이적인 수준입니다. 2026년 2월 기준 시가총액은 1조 8,090억 달러로 세계 6위 기업이 되었습니다.
고객 포트폴리오도 화려합니다. 2024년 기준 애플이 전체 매출의 24%를 차지하는 최대 고객이었고, 2025년부터는 AI 칩 수요가 폭발한 엔비디아가 1위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AMD, 퀄컴, 미디어텍 등 세계적인 칩 설계 기업들이 모두 TSMC 고객입니다. 특히 전 세계 첨단 칩(7nm 이하)의 92%를 TSMC가 생산하고 있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작은 기업을 위한 교훈
TSMC의 사례는 소기업에게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핵심 역량에 미친 듯이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TSMC는 설계, 마케팅, 브랜딩 같은 "좋아 보이는" 영역을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작은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정말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20%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나머지는 아웃소싱하거나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는 누구보다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명확한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둘째, ‘고객과 경쟁하지 말라’는 원칙입니다. B2B 서비스업이라면 특히 중요합니다. 컨설팅, 제조, 디자인, 개발 등 고객의 비즈니스를 돕는 일을 한다면, 그 고객과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순간 신뢰는 무너집니다. TSMC처럼 "우리는 당신의 파트너이지 경쟁자가 아니다"라는 명확한 포지셔닝이 장기적 성장의 열쇠입니다.
셋째, ‘집중이 기술 우위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TSMC는 제조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3nm 공정 같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소기업도 좁은 영역에서 깊이를 추구하면, 대기업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문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 반경 5km 이내 배관 수리는 우리가 최고다", "특정 산업의 SEO는 우리가 최고다" 같은 초집중 전략이 생존의 핵심입니다.
TSMC의 성공은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를 미친 듯이 잘하라"는 80/20 법칙의 완벽한 증명입니다. 자원이 부족한 소기업일수록 이 원칙은 더욱 절실합니다.
출처
- Quartr: The Silicon Empire: TSMC's Revolution and Morris Chang's Legacy
- Semiwiki: A Brief History of TSMC Through 2025
- Britannica: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 (TSMC)
- Counterpoint Research: 전세계 반도체 순수 파운드리 점유율: 분기별 데이터
- TSMC 2024 Annual Report
- CNBC: Nvidia set to supplant Apple as TSMC's top customer
